현재 필리핀 인권상황에 대한 개관

정진우 목사 (필리핀인권국제연합, ICHRP한국 의장)

스페인 미국 일본으로 이어진 오랜 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의 하나였지만 누적된 정치 경제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필리핀 민중의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1986년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과 2001년 부패혐의를 받고 있던 에스트라다를 대중운동을 통해 몰아낸 민중들은 점점 더 폭압적 행태를 보이고 있는 두테르테 정권과 오늘도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2016년 5월 출범한 두테르테 정권은 필리핀의 고질적 문제인 부채척결을 바라는 민중들의 두터운 지지로 출발하였다. 두테르테 정권은 그간 필리핀을 장악해 온 루손섬을 중심으로 한 정치경제 주류 지배집단인 올라키키 즉 과두 집단 출신이 아닌 비사야 출신인데다 그가 20년 남부 민다나오의 다바오시장으로 쌓아 온 반부패 이미지를 정치적 자산으로 하여 필리핀 첫 좌파 대통령을 자처하며 민중의 압도적 지지로 선거 승리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필리핀 대통령으로 첫 번째 국정연설(SONA)에서 민족주의 단체인 바얀(BAYAN)), 강성 노조인 KMU, 진보적 사회운동단체인 카라파탄(Alliance for the Advancement of People`s rights)등을 대통령 궁으로 초청해 대화와 포용정책을 선언했다. 그동안 전례가 없는 이런 파격적 조처는 필리핀의 진보적 사회운동과 국민들에게 큰 기대와 희망을 갖게 했다. 두테르테는 그동안 정부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들과 함께 앉아 빈곤 퇴치, 토지문제. 외국의 개입과 진정한 농업 개혁, 국가 산업화, 비정규 계약직 종료 등과 같은 진보적 의제들을 청취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아낙파위스 의원 등 좌파와 진보 성향의 인사들을 내각에 임명하면서 필리핀 국민들의 기대는 더욱 커졌고, 그는 필리핀 국민들을 괴롭힌 뿌리 깊은 문제를 이해하고 50년 이상의 무장 투쟁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2016년 7월 첫 국정연설(SONA)에 앞서 네덜란드에 특사를 보내 국민민주전선(NDFP) 지도부를 만나 평화회담 재개 문제를 논의했으며 평화 조치의 일환으로, 2016년 8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평화회담 재개에 최소 20명의 정치범과 NDFP 평화자문위원을 석방하고 참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화국면도 잠시였고 마약과의 전쟁을 본격화하면서 그는 점점 더 반민중적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약과의 전쟁은 그 명분과 달리 가난한 민중들과 노동자 농민 토착민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겨냥하고 있음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최근(2020년 6월4일자) 필리핀 인권상황에 관한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최소한 8,600여명이 경찰과 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고 필리핀 인권운동가들의 말을 빌리면 3만영 이상이 희생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개헌을 통해 장기적 권력기반의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NDFP와의 평화협상은 중단되었고 2017년 전면적 전쟁 정책을 발표하여 폭력과 테러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비콜, 사마르 네그로스 섬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명령하여(Memorendum 32) 무고한 농민들을 학살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또한 지역 공산주의 세력과의 무력 충동을 종식시킨다는 명목으로 국가 테스크 포스를 만들어 억압을 강화하고 있다.


2017년 마라위의 황폐화와 민다나오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강제 소거, 체포 구금, 비사법적 살인 등 다양한 인권침해가 빈발하고 있으며 전국 태스크포스 팀은 합법적인 대중 단체, 교회 및 에큐메니칼 기관을 비롯한 수많은 인권, 평화, 종교 단체들에게 적색 테깅을 통해 감시 체포 구금의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또한 경찰과 군대는 조작된 증거를 통해 수색영장을 확보하고 당국에 비판적인 개인이나 단체에 대한 탄압을 일상화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정치범들의 수도 6백명이 넘고 있다.

최근의 코로나 위기 상황속에서도 두테르테 정부는 감영병 예방 보다는 국민의 권리를 억압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관철 시키는데 위기를 이용하는 일련의 조처를 감행하고 있다. 필리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방송인 ABS-CBN(체널2) 방송의 허가를 자신들에게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허가를 취소하고, 반테러 법안 같은 수사시관의 자의적 해석으로 헌법적 가치를 중지시킬 수 있는 초헌법적 반인권적 법령의 제정을 시도하는 것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코로나 위기속에서 어느때보다는 필리핀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리핀 민중들은 이러한 극심한 억압과 탄압 속에서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그들의 꿈을 버리지 않고 다시 일어서고 있다. 그간에 운동진영 안에 있던 작은 차이를 연대와 협력의 정신으로 극복하며 단결함으로써 각성된 민중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신념이 어느때보다도 강화되는 가운데 정의와 평화를 향한 행진을 힘차게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