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 헤이트의 배경과 원인 1

미국장로교 세계선교부 동아시아지역담당 이은주 목사와의 인터뷰

– 최근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혐오와 폭력 (Asian Hate)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언론은 흑인에 의한 한국계 미국인들의 폭력 사건을 빈번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한국계 미국인인 이은주 목사를 모시고 최근 아시안 헤이트의 배경과 원인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이 목사님은 미국장로교회에서 한국으로 파송된 에큐메니칼 동역자이며, 현재는 동아시아 지역 담당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1.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 아시아 폭력의 배경과, 이것이 COVID 19와 관련된 새로운 현상인지 아니면 기존의 반 아시아 혐오가 되살아난 것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기존의 반 아시아 혐오가 되살아나는 것일 뿐입니다. 코로나19는 단순히 방아쇠 역할을 하였을 뿐입니다. 즉 코로나19가 아시아(중국)로 인종화되었고 이것이 반 아시아 혐오가 다시 출현하기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미국의 아시아 증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종이 무엇인지, 인종차별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종과 인종차별이 미국의 사회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종은 전적으로 사회적으로 형성된 개념이고 미국은 이러한 개념에 기초한 인종화된 국가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미국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든 인종차별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미국이라고 알려진 이 땅으로 이주한 유럽인들은 인종을 기본적인 범주로 삼아 국가의  모든 시스템(즉, 경제, 정치, 교육, 사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제도들은 소위 백인들로 간주되는 인종에게 모든 권리와 특권을 부여했고  백인이 아닌 인종들에게는 그러한 권리와 특권들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 인종 분리는 미국 사회의 구조 전반에 걸쳐 내재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종차별은 편견에 근거한  것만은 아닙니다. 인종적 편견이 체계적 권력과 구조에 의해 뒷받침될 때 인종차별이 발생합니다.

미국은 인종에 기초한 노예제도의 법적 체계를 가진 유일한 나라입니다. 제도적 노예제도가 종식되었을 때, 백인들은 그들을 위해 무료로 일했던 ‘자유로운’ 노예들을 대신할 또 다른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대륙횡단철도를 주도한 백인 회사들에게 수만 명의 중국 계약노동자가 없었다면 그 공사는 완공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협적인 오염물질로 인식된 ‘노란 위험’이라는 용어는 중국인들에 대한 두려움을 표시하는 것이었고, 결국 미 의회는 1882년 중국인 배제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인을 ‘황색 위험’으로 보는 이러한 고정관념은 미국 국민의 사회문화적 정신세계에 스며들었습니다. 이러한 공포에 바탕을 둔 아시아인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은 그 때 이후로 잦아들었지만, 이제는 코로나로 인한 불안감이 아시아인에 대한 공격 증가라는 새로운 패턴으로 바뀌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 19를 ‘중국 바이러스’,  ‘쿵 플루’라고 부르면서 미국 사회의 ‘황색 위험’에 대한 공포를 촉발시켰습니다.

2. 한국 뉴스 보도로 인해 한국인들 대부분은  흑인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아시아인들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이게 사실인가요? 아니면 상황이 더 복잡한 건가요?

저는 일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아시아인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고, 이 두 인종 공동체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면밀히 살펴 보면, 이러한 긴장은 백인의 우월성에 기초한 미국의 인종적 위계질서에서는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시아인들에 대한 폭력사태를 흑인과 아시아인들 사이의 갈등으로만 보는 것은 인종차별로 아파하는 모든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인 동시에 인종차별적 사회구조로부터 득을 얻는 백인들의 기득권에 봉사하는 것이 됩니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이민자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한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1991년 3월 3일, 한 무고한 구경꾼이 네 명의 백인 LA 경찰들에 의해 무장하지 않은 흑인인 로드니 킹이 폭행당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잡았습니다. 그의 영상이 전국에 방송되었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그 사건은 법정으로 갔고, 네 명의 경찰관들이 재판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오랫동안 경찰의 잔혹행위의 희생자가 된 흑인들은 이번에는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명백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매우 실망스럽게도 경찰관들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고, 로스앤젤레스는 격노했습니다.

이 격노에 휩싸인  민족 중 하나가 한인 사회였습니다. 한 추정치에 따르면, 한국 상인들이 약 5억 달러 상당의 피해를 입었고, 한국인 전체는 한국 상인들이 피해본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잃었습니다. LA 경찰은 한국인을 버리고 백인 지역인 웨스트우드를 방어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언론이 내보낸 메시지는 흑인과 한국인의 갈등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서로 다른 인종 집단들을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게 하는 것은 인종적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백인 우월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됩니다. 아시아인들은 모범적인 소수민족으로 정형화되어 왔으며, 이 신화는 아시아인들을 다른 인종 집단, 특히 흑인과 대립시키기 위해 사용되어 왔습니다. 아시아인들은 인종차별적 제도에 대한 흑인들의 분노를 흡수하는 완충제로도 활용됨으로써 백인 기득권층이 인종차별적 제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있는 탈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흑인과 아시아인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지만, 그들 사이의 연대도 매우 탄탄하다는 사실입니다.

3. 아시아인들에 대한 폭력의 희생자 중 몇몇 아시아 남성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아시아 여성들입니다. 특히 애틀랜타 총격사건을 보면 그렇습니다.  반 아시아 혐오에 성별적인 요소가 있나요?

저는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들이 아시아계 미국인 남성들보다 2.3배 더 괴롭힘을 당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반 아시아 혐오에는 확실히 젠더적 요소가 있습니다. 애틀랜타 총격사건은 실제로 아시아계 여성들이 젠더 때문에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하는 방식에 대해 매우 중요한 몇 가지점을 시사해 줍니다.

살인을 저지른 젊은 백인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의심스러운 개념인 ‘성중독증자’ 라고 얘기되지만 조금 더 깊숙이 이 사건을 살펴 보면, 1. 그는 자신의 성적 욕구를 여성을 위협으로 규정하는 비자발적인 성적 중독으로 외면화했습니다. 2. 그는 여성들이 그의 성중독으로 추정되는 것을 자극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협으로 인식했습니다. 3. 그는 위협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4. 그는 안마시술소에서 일하는 모든 아시아 여성들이 매춘부라고 추정했기 때문에 제거 대상으로 세 개의 아시아 스파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5. 아시아계 8명이 사망했고, 이 중 6명은 여성이었습니다. 요컨대, 그는 상상 속의 위협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시아 여성에 대한 과도한 성애화의 유산은 미국 역사에 깊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1882년 법률로 제정된 중국인 배척법 이전에도 중국 여성은 모두 매춘부라는 인식이 압도적이었습니다. 1875년 호레이세프 대표는 중국 여성의 성관념이 느슨한 것에 대해 깊은 도덕적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페이지는 의회에 페이지법을 도입하여 “정숙하지 않은” 중국인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시켰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아시아계 여성들은 전형적으로 백인 남성들의 도덕성을 위협하는 이국적인 유혹의 주인공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애틀랜타에서 일어난 일은 이 이야기의 반복입니다.

저는 이번 사태를 보며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주의 기독교의 역할입니다. 전반적으로 기독교는 신체와 성 (sexuality) 문제에 있어 매우 골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의 한 연구는 코로나19의 상황하에서 백인 기독교  민족주의가 외국인 혐오와 인종차별을 조장하는 데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지목했습니다. 살인자인 백인은 그의 아버지가 침례교 목사이기 때문에 침례교회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그의 이러한 종교적인 성장 배경이 그의 행동에 분명 어떠한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반문해 봅니다.

* 번역/정리: 신승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