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이슈” 설립자 멕스 에디거 선생과의 인터뷰
“버마이슈” 설립자 멕스 에디거 선생과의 인터뷰
* 에디거 선생은 미국 태생이지만 1971년 이후 줄곧 미얀마, 베트남, 태국 등 아시아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일해 온 평화운동가이다.
1. 지난 달 미얀마 군부 쿠데타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근, 현대 미얀마 역사를 잠깐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군부가 선출된 정부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미얀마에서는 놀랄 일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그 시기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얀마 군부 (타트마도)는 국가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그들의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들의 전권을 재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때까지 제한된 “민주주의”를 기꺼이 허락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얀마 역사를 통해 배웠습니다. 현재 쿠데타 국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미얀마 식민지 역사와 이어지는 군부독재에 대해 잠깐 말씀 드리겠습니다.
영국은 1800년대 초 인도와 중국 사이의 전략적 교역로로서의 위치뿐만 아니라 인도에 대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할 필요성 때문에 버마 (혹은 미얀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농업이 버마의 주요 산업이었지만 인도와 중국 사이의 무역은 버마를 통과하면서 하나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옥, 금, 티크 재목 등을 포함한 거대한 천연자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1824년, 일련의 전쟁을 통해 영국은 버마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들이 폭군이라고 주장하는 “티바우 민”왕을 축출했습니다. 영국에 대한 미얀마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지만, 식민지 지배력을 무력화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불교 신자가 대부분인 버마족은 미얀마에서 가장 큰 민족 집단이지만, 135개에 이르는 다른 소수 민족이 있으며 대부분 국경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전체 인구의 약 2%를 차지하는 무슬림 로힝야족은 버마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따라 살고 있는 무국적 집단입니다. 어느 나라도 로힝야족을 환영하지 않아, 그들은 때때로 세계에서 가장 환영 받지 않는 사람들로 불려져 왔습니다. 1970년대, 타트마도는 버마로 돌아갈 희망조차 빼앗긴 많은 수의 로힝야족을 방글라데시의 비참한 난민수용소로 몰아 넣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아직도 많은 단체들은 군부의 이러한 행위를 로힝야족에 대한 집단학살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소수 민족들은 미얀마를 지배해 온 버마족의 통치에 저항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땅, 문화, 언어, 종교를 치열하게 지켜왔습니다. 버마족에 대한 소수 민족의 이러한 불신은 영국인들이 미얀마 국토와 경제에 대한 지배력을 키우면서 빠르게 눈에 띄었습니다.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그들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분열과 통치 (divide and rule)” 전략을 사용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매우 강한 민족주의자였던 버마족에 대해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 다양한 소수 민족들이 대항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영국인들은 소수 민족들이 영국의 존재에 더 개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18세기 초에는 많은 소수 민족들이 기독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카친, 친, 카인족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영국과 소수 민족간의 이러한 긴밀한 관계 때문에 식민지배자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다수의 버마족과 소수 민족들 사이에 쐐기를 더 깊게 박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두 그룹 사이에 더 강한 불신과 반감이 생겼습니다.
2. 영국 식민지배는 미얀마의 군부 통치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민족 갈등이 인권침해와 군부독재에 빌미가 되는 것인지요? 민족 자결권을 인정한 팡롱협약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민족 독립의 물결이 아시아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 버마는 독립했고, 영국의 강력한 동맹국이었던 소수 민족들은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독립 버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버마군 사령관인 아웅산 장군에게 독립국가의 지도자가 될 군사 및 정치적 권력 기반을 보았습니다. 1947년 2월 12일, 아웅산 장군은 남부 샨(Shan) 주 팡룽 (Panglong)에서 많은 소수 민족 지도자들을 만나 버마족과 다른 민족들 사이의 오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팡룽 협약이라고 알려진 이 협정이 샨족, 친족, 카친족, 그리고 아웅산 장군의 지도자들에 의해 서명되었습니다. 팡룽협약이 중요한 것은 이 협정이 소수 민족들에게 내부 통치에 대한 완전한 자율권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출발로 버마 연합이 설립된 것입니다.
이 협정이 많은 긍정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일부 민족들은 무시당하거나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독립국가를 요구하는 일부 단체와 함께 버마연합에 대항하여 여러 무장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웅산 장군은 국가 독립절차를 마치기도 전인 1947년 7월 19일 암살되었습니다. 우누가 초대 총리가 되었고 민주주의를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소수 민족의 불신은 계속되었습니다. 1949년 1월 27일, 아웅산 장군이 암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렌족은 민주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어서 다른 민족들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에게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문제가 아니라, 우누 정권하에서 소수 민족의 자치권과 전면적인 참여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영국 식민지 시대의 분열과 통치 정책은 버마족과 소수 민족들 사이의 불신과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일부 민족들은 이제는 그들이 결코 현 정부에서 동등한 참여권을 보장 받을 수 없다고 믿으면서 연방제보다는 완전한 독립국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카렌민족연합의 써 바기 초대 회장은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카렌족이 고수하고 있는 독립의 네 가지 원칙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 항복은 없다.
• 카렌은 국가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 우리는 무장해야 한다.
• 우리의 정치적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1947년 버마를 특정한 국가 권리를 가진 민주국가로 선언한 헌법은 일부 민족들이 버마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10년 안에 연방에서 탈퇴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했습니다. 불평등을 이유로 탈퇴하려는 이들 소수 민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지만, 우누 총리는 이러한 탈퇴 요구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고 1962년 3월 2일 네윈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우누 총리의 약한 지도력으로 버마 연방이 너무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공포감이 군부 쿠데타의 한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쿠데타 후 소수 민족들의 무장투쟁이 더 격화되었고, 네윈 장군 휘하의 국가 경제는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독립 당시, 버마는 동남아시아에서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버마의 대학과 병원을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했습니다. 1987년, 네윈의 통치하의 버마는 UN에 의해 최저개발국(LDC)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지위를 부여 받았습니다. 네윈 장군의 독재는 갈수록 강화되었고, 그에 대한 분노 역시 거세졌습니다. 1988년 8월, 도시 거리에서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고 8888 저항은 본격화 되었습니다. 군부는 이 시위들이 짧은 시간 동안 계속되도록 허용했고, 9월 18일, 폭력적으로 대응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수천 명을 밀림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밀림으로 들어간 이들은 무장한 민족들과 함께 연합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아웅산 수지 여사는 민주화 투쟁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그녀는 군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북돋우고 점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1990년 군부는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고 수지가 이끄는 전국민주연맹 (NLD)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군부는 국가 정치의 많은 부분을 관장하는 데 성공했고 아웅산 수지 여사가 총리가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NLD에 리더십을 부여했고, 정치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3. 민주화를 향한 미얀마 국민들의 투쟁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 우리가 어떻게 연대하면 될까요?
2015년 선거에서 NLD의 승리는 확실히 축하할 만한 것이었고, 미얀마 사람들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또한 시기적으로 매우 중요했습니다. 과거 군부의 행위를 그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협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용서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군부는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국가의 유일한 권력으로 재 탄생할 수 있는 적절한 때를 기다릴 것인가? 라는 두 가지 예상 중, 작금의 상황은 후자가 맞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1988년 도시 주민들을 상대로 벌인 잔학행위와 지난 수십 년간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탈취하고 오늘날까지 살인과 강간, 파괴를 자행하고 있는 군에 책임을 묻는 대신, 국제사회는 물론 많은 미얀마의 많은 NGO들이 ‘관망’하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활용 가능한 기회를 사용하여 사회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2월 군부 쿠데타는 군이 국가의 재정 통제력을 포기하거나 권력을 이양하려는 의지가 없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많은 시민사회와 국제사회의 ‘관망’하는 태도는 군부가 그들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하는 시간을 벌어 주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군부는 지금 시민 사회, 전문가, 학생, 심지어 일부 경찰을 포함한 사회 각계각층의 대규모 저항에 직면해 있습니다. 시민사회의 ‘관망’적 태도인 것처럼 보였던 것은 사실 쿠데타에 신속하고 강력하게 대응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었다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창의성과 결단력이 끊이지 않았고 국제적인 지지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조슈아 캐롤은 2월 13일 알자지라의 기고문에서 시위대는 모든 통치 메커니즘의 작동을 멈추게 함으로써 쿠데타 지도자들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쿠데타의 합법성과 명분을 차단하며, 파업을 통해 정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정부의 자금원을 차단하는 노력에 국제 사회가 연대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결론이 도출될 수 있을까요?
1) 군부가 물러날 때까지 미얀마의 민주화 투쟁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부가 물러난다고 해도, 미얀마 국정의 불안정의 핵심이 민족 갈등이기 때문에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로힝야족의 상황도 포함됩니다. 한 국가 내에서 어떤 한 집단이 소외되거나 불평등하다고 느껴지는 한, 견고하고 지속적인 민주주의는 성장할 수 없으며 군부는 그것을 철권통치를 계속하는 구실로 삼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 그들은 군부만이 나라의 평화와 안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고 선전하면서 소수 민족들과 협상하기보다는 그들에 대해 군사력을 사용함으로 군부 통치의 정당성을 증명했습니다.
2) 군은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1988년처럼 그들은 국민들이 길거리로 나와 잠깐 저항하게 할 것이고, 국가 안보를 빌미로 저항하는 국민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할 것입니다. 한 가지 희망은 국제사회가 단순히 성명만 내는 것이 아니라, 미얀마 군부의 약점인 군의 재정 확보에 타격을 가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국가 자금에 대한 통제 없이 군부는 그들의 통치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쿠데타 이후 미얀마 고위 군부와의 모든 접촉을 중단하고 그들에게 여행금지를 조치하고 있는 뉴질랜드는 좋은 예가 되고 있습니다. 미국도 이제 비슷한 접근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COVID-19로 인해 이미 경제적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광범위한 제재나 불매운동보다는, 이러한 조치는 군을 직접적으로 향하고 있어, 군부가 물러설 수 있게 하는 국제적인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3)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를 정착하기 위해서는 최근의 쿠데타 뿐만 아니라 이미 로힝야족을 포함해 수십 년 동안 고통을 겪어온 국경 주변의 토착민들을 괴롭히고 살해한 것에 대해 군부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잔학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그들의 권력욕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내전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4) 미얀마의 국민들은 그들의 투쟁을 포기하지 않으며 다양한 창의성과 대단한 결의를 가지고 투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1988년 봉기 이후의 경험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고 그들은 이제 군대와 대치하고 있는 막강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야당인 NLD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2015년 선거 이후 젊은 세대는 더 많은 자유를 경험했고, 외부 세계와 폭 넓게 접촉했으며 교류와 훈련을 통해 국제 사회와 만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저항의 원천적인 힘이고 그들에 대한 폭력적인 군사적 대응은 일시적인 후퇴를 강요할 수도 있지만, 결국 민주주의를 위한 꿈을 포기 시킬 수 는 없을 것입니다.
5) 미국 전역의 미얀마 단체들도 자결권 쟁취를 위한 투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 투쟁은 군부가 소수 민족에 대한 폭력에 대해 책임을 지고, 미얀마 정부가 그들의 땅과 마을, 문화와 언어와 역사를 존중하리라는 신뢰와 확신이 생길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그들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동등한 참여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 투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 번역/정리 – 신승민